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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건축문화(르네상스 건축)카테고리 없음 2023. 7. 29. 07:49
유럽에서는 14세기부터 중세의 봉건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그리스도교회 중심의 중세문화도 쇠퇴되고, 새로운 근세의 사회와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운동과 민주사회운동, 종교개혁 등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과 신앙의 우위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봉건적 구속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사회계층의 욕구와 교황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민족적 자각과 결부되어 자유민주운동과 세속적인 사회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르네상스는 15세기 때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프랑스·독일·영국 기타 유럽 각지에 전파된 중세사상에 반항하는 신풍조를 말한다. 르네상스는 원래 불어(佛語)로서, 오랫동안 쇠퇴된 것을 재생시킨다는 의미로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세기 문화는 그리스도교의 신본주의적인 사상에 입각한 신세계와 새 낙원을 건설하려는 정신에서 발전되었던 것이나, 르네상스 문화는 인본주의적 사상에 입각하여 종교적 속박이 없는 인간적이며, 자유정신이 넘치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여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인본주의 사회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그리스 및 로마 사회의 정신을 회고하게 되었으며, 이를 부흥 혹은 재생하여 인간주의적 정신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건축문화는 단지 외형적 모방에 그친 것이 아니고, 클래식의 디자인과 고딕의 구조적인 지식을 기초로 변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르네상스는 인간적 자유와 수양에 대한 근세의 출발점이라 하겠으며, 이러한 점으로 중세와 대비하여 그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근세문화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바자리(Vasari)가 비판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는 중세와 대비하여 생각할 것이 아니라, 중세 정신주의의 기반이 밑거름이 되어서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중세에서는 자연에 대한 복종의 미덕을 칭송하였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의 기쁨, 아름다움, 풍족함을 표현하고 감수하며 감사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페트라르카(Patrarca)는 대담 솔직하게 자연을 노래하였고, 단테(Dante)는 인간창조의 이상을 높이 앙양시켰으며, 보카치오(Boccaccio)는 고전에서 현실을 발견하였다. 이들 문학가들의 사상은 매우 인간적이어서 단순한 종교문학에서부터 벗어나 자유정신이 넘쳤었다. 이들 선구자의 정신에는 종교로 인하여 상실하였던 그리스도교 이전의 자유인으로서의 노력·희망·정서가 그 중심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속박을 벗어나 그 위선을 배척하고 진리를 구가하며 인간성의 개방을 목표로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미술 및 문학에 있어서의 클래식의 연구열이 왕성하였으며, 각 방면에 비중세기적인 경향이 보급되었고 새 시대의 막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즉 14세기 말엽에서 15세기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터키의 압박을 받아 드디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게 되며, 그 땅에 살던 많은 학자가 이탈리아에 도피해 왔으며, 이들이 환영을 받아 연구에 종사하게 되고, 이탈리아 학술 및 예술의 지도자로서 많은 역할을 하여 르네상스 운동의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원래 훌륭한 클래식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전적 예술품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전연구에 유리하였고, 뿐만 아니라 십자군 이후 각 도시는 동양무역을 하여 동서문화 교류의 기회를 많이 가졌다. 당시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 피렌체는 그 지방의 권세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가 문학 및 예술의 애호가이었으므로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축가로는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도나텔로(Donatello)·알베르티(Alberti)·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미켈란젤로(Michelangelo) 등 천재적 건축가들이 나왔으며,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각지에 파급되었다. 원래 이탈리아는 고전시대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건축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고전문화는 그들 생활 속에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각 시대를 통하여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요소이다. 그러므로 13세기에 북유럽에서 발생하여 전유럽을 휩쓸은 고딕 건축문화도 이탈리아에서는 큰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14세기에 들어서 각 방면에 고전학예 연구에 대한 사조가 왕성하게 됨에 따라 건축에서도 고전양식 연구의 열이 점차 높아졌고, 1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전 로마의 문화를 기초로 하여 그 양식요소들을 창의적으로 자유롭게 구사한 새로운 건축양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세건축문화에서 건축은 구조면과 의장(意匠)면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을 합리적으로 통일시키려는 이상을 향하여 발전하였으며, 고딕 건축문화에 이르러서 구조체와 디자인이 종교적 관념에 의하여 융합조화되어 그 이상을 구현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고전 로마 건축의 연구로 말미암아 외관에 구애되어 구조와 디자인이 분리되어 있었던 고전 로마 건축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며, 또 일면 구조와 디자인을 융합시킨 중세의 건축적 이상을 이해하고 있었던 까닭에 고전양식을 기초로 하여 건축의 구조체와 디자인을 조화 통합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고딕 건축에서는 그 외관에 있어서 수직선을 디자인의 주요소로 하여 앙천적인 종교이념을 표현하였으나, 르네상스 건축은 이와 정반대로 수평선을 디자인의 주요소로 하여서 인간의 사회관과 그 횡적인 유대를 상징하며, 그 휴머니티(humanity)의 이념을 표시하였음은 단적으로 두 건축문화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흥미 있는 사실이라 하겠다. 또 고딕 건축에서는 개개의 형태의 미적 통합에 힘을 썼으나, 르네상스 건축은 그 전체적인 평면계획 및 그 외관의 구성에 있어서 프로포션(proportion)·미적 균제(symmetry) 등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역시 좋은 대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당 건축은 이 시대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기에서는 잠재적으로 남방의 전통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은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거침없이 자기 방식에 따라 성당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전의 양식을 그리스도교 이념에 모순되지 않게 적응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가졌다. 속세적인 수평선의 강조를 천국을 지향한 수직선의 희구와 조화시키는 시도들에서 거장들의 개성과 역량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딕 시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집중식 회당이 많은 관심을 갖고 추구되었다.
교회건축의 형식을 보면 평면은 때로는 주로 로만 바실리카식에 근거한 것이며, 그리크 크로스(Greek cross) 또는 라틴 크로스(Latin cross) 등의 평면형이 사용되었으나, 내부에 다수의 기둥을 병립시키지 않고 구획을 크게 하여 광활한 공간을 만들었다. 맹목적으로 그리스의 전통을 답습한 로마시대와는 달리 의장(意匠)면의 고려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구조미에 종교적 열정을 충일시켜 표현하였으나, 르네상스 건축은 힘의 균형에 의한 정적인 미의 표현을 갖도록 건축가들이 노력하였다. 르네상스 건축의 세부수법은 고전 로마의 것을 본땄으나 단지 모방한 것이 아니고, 예술적 감각으로 변용하도록 힘썼으며, 건축은 일반적으로 토대 위에 벽체를 놓고 벽체 상부에 코니스를 수평으로 돌려 벽면을 구획 장식하였고, 이 세 가지의 요소를 바탕으로 창과 출입구 기타 세부 취급에 조화를 찾았다. 특히 벽면은 이 모든 디테일(detail) 외에 건축의 미관을 나타내는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 벽면의 미를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 같은 새로운 방법으로 형성하였다. 르네상스 건축의 파사드(façade)의 취급에는 안정감에 의한 예술적 미를 나타내게 하였으며, 고대 오더의 원칙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그 세부의 취급은 매우 자유로웠고, 건축가들이 다방면에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미적으로 가치 높은 것이 창조되었다. 오더에는 터스컨(Tuscan)식·도릭식·이오닉식·코린티안식·콤퍼지트(composite) 식이 있다. 지붕의 보올트보홀트 및 돔은 가장 특이하다 하겠으며 자유자재로 설계되었다. 돔의 구조법은 비잔틴 양식에서 배운 것이며, 드럼(drum)을 높게 하고 여기다 창을 만들었다. 이 형식은 르네상스식 돔의 관례적인 수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쪽 천장은 회벽으로 바르고 그 위에 프레스코(fresco)를 그렸으며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다. 고딕 시대에 애용되고 극단적으로 발달된 리브 보올트와 같이 번잡한 보올트 구조는 없어지고, 오히려 배럴 보올트와 같이 간단한 로마식 보올트 구조법이 부활되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 장식은 매우 중요시되었으나 중세 건축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건축의 일부분으로 장식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미술 작품을 장식적으로 부가시킨 감이 있다. 그러나 건축과 잘 조화되며 장식적으로 좋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당시 건축가로서 화가 또는 조각가·공예미술가를 겸한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다. 화법의 과학적 연구 결과로서 투시도법이 발견되고, 이 방법이 당시의 건축구성면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장식문양은 고전문양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나, 직접 지방의 식물, 자연의 관찰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칸서스·뇌문·기하문양·트로피·리본·화식·화환·인물·동물·기구 등을 조합하여 사용하였다. 르네상스 건축은 그 정신에 있어서 오랜 기간의 종교세계에 사로잡혀 있었던 중세의 막을 헤치고 자유의 세계로 진출하게 한 것이며, 이 운동이 후에는 근대건축을 유도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근대건축의 근원으로서 르네상스 건축문화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1420~1434년간에 완성된 것으로 브루넬레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브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9~1446)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가 중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그는 이미 소년시대에 보석·금세공(金細工)의 기술을 배웠으며, 후에 기계에 관한 학문을 실제로 배운 뒤 조각가를 지방 하여 그 기법을 배웠다. 그가 27세 때에는 로마에 유학하여 고전 로마의 건축유례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4년 후 고향에 돌아와 건축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많은 훌륭한 건축을 남겨 놓았다. 그는 로마 건축양식을 재현한 것이 아니었고 고전적 원주·필라스터·엔태블러처 등의 건축구성 요소들을 고전 로마인이 상상도 못 하였을 만큼 명징한 새로운 방법으로 구성하여 형태와 공간을 모두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전에 없던 자유로운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고전적 모티프는 단순·경쾌·우아하였으며, 후에 로마에서 16세기 초에 발전된 무게 있는 엄격한 고전 모티프와는 전혀 달랐고 새로운 건축발전에 크게 공헌한 건축가였다. 원래 이 돔의 축조문제는 14세기에 이 성당이 계획된 때부터 내려온 숙제였었으나 결국 설계현상(懸賞) 모집에 당선한 브루넬레스키의 안에 의하여 완성되게 되었다. 돔의 지름은 43m로 8각의 드럼 상부에 놓여 있으며, 그 돔의 구조는 고딕양식의 원리를 따랐고 기존 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이 돔은 리브(rib)를 갖는 2중 셸(shell)로서 중앙에서 방사하는 8개의 주리브(main rib)와 그 사이에 16개의 중간 리브(intermediate rib)가 있다. 리브와 리브 사이에는 수평방향의 아치가 줄지어 있으며, 이들 리브와 아치를 사이에 두고 내각과 외각이 맞서 있고, 그 형상은 거의 비슷하다. 드럼에는 버트레스가 없으며 채광용의 원형창을 드럼 주위에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브루넬레스키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것으로 이 돔의 형식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범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건축문화사상 근세의 시발점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돔의 건축형태는 주어진 어려운 건축의 과제를 전에 없던 독창적인 방법으로 건축가가 해결한 좋은 예가 되었다. 성스피리토 성당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바실리카식 교회당이다. 평면은 3랑식으로 트랜셉트 및 앱스까지 아일이 돌아간 것이 특이한 형식이라 하겠다. 네이브는 목조 천장이며 실내열주 상부는 아치가 축조되었다. 주두에는 각각 독립된 엔태블러처가 있으며, 그 위에 아치가 서게 되어 비잔틴 양식의 부주두와 비슷한 모양을 갖게 만들었다. 이 건물의 평면은 기하학적 계획의 걸작이며 초기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공간에서 수학적 관계를 추구했던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성당은 한쪽을 연장시킨 중앙집중식 공간으로 생각되며 장축형의 특징은 전통적 기능에 맞게 채택된 것이다. 이 성당의 형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나타낸다. 당시의 우주의 질서는 단순한 수학적 관계로 이해되었으므로 브루넬레스키는 이 건물에서 그것을 나타내려 하였다. 또한 하나님 중심적인 것에서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이 건물 내부에서 사람은 돔 바로 아래에 서서 건물 중심에 공간을 주제 하는 느낌을 갖도록 계획되어 있다. 성안드레아 성당 이 성당은 만투아(Mantua)에 있으며 알베르티가 설계한 것이다. 1472~1512년에 건축되었으므로 르네상스 성당으로는 대표적인 것이다.알베르티(LeonBattistaAlberti,1404~1472)는 처음 고전문학을 연구하고 그 방면에서도 이름이 있었으나, 후에 그는 건축가로서 활동하게 되었고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건축작품의 특징은 장식적으로 완성된 점이라 하겠다. 그는 고전적 모티프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공간을 구성하며, 명징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보다 건축에 법칙을 부여하고 동시에 건축을 로마적인 특색을 갖게 조형하려는 의도를 나타냈다. 그러한 의미에서 후에 로마에 발달된 중기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성당의 평면은 라틴 크로스로 3랑식이며 실내는 배럴 보홀트가 축조되었고, 네이브와 트랜셉트의 교차부에는 높은 돔이 있으며 그 드럼에는 채광용 창이 있다. 이 건축의 외관 정면은 로마의 개선문(凱旋門)을 연상하게 만든다. 이 평면은 성스피리토 성당에서와 같이 전통적인 장축형 평면형식에 미적으로 더 선호된 중앙집중식 평면을 결합한 것이다. 3랑 식바실리카의 아일 부분은 소제실들로 이용되어 내부가 결국 단랑식인 것 같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평면형식은 후에 이탈리아 성당에서 선호되어 사용된 형식의 선구적인 예이다. 소제실들이 개방적인 것과 폐쇄적인 것이 연달아 반복되어 선율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나 중앙제실부의 집중적인 공간구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독창적으로 계획된 정면 외관은 로마식 모티프인 신전의 정면과 개선문 아치의 두 요소를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루브르 궁전 르네상스 초기에는 프랑스가 군주전제정치를 하였으며, 군주 및 귀족 등이 세력을 갖고 있어서 그들이 경쟁하여 장대한 궁전과 성관(城館)을 건설하였으므로 그 당시의 건축은 주로 궁전과 귀족의 성관이었다. 루브르 궁전은 프랑수아 1세부터 루이 14세에 이르는 프랑스 르네상스 중 가장 예술활동이 많았던 시대 전부를 통하여 건축되었으므로 프랑스 르네상스 각 기(期)를 대표하는 건축으로, 이 건축에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의 전발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궁전건축이다. 루브르 궁전은 122m 평방의 중정을 둘러싸고 건축되었고 중정에는 주랑이 없으며, 하층은 코린티 안 오더, 상층에는 콤퍼지트 오더의 편개주(片蓋柱)가 사용되고, 최상층은 낮은 편개주가 사용되었으며, 벽면 코니스 등에 사용된 조각장식 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궁전과 다른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